그 시절 사랑했던 홍콩 우리는 뭘까

이 카테고리는 그동안 여기저기 여행 다녔던 얘기나 끄적이려 만들었는데, 최근 풍소강 감독의 <거장의 장례식>을 재밌게 보다 대학 시절 홍콩영화덕후였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홍콩 얘기가 하고 싶어졌다. 얼마전 크리스토퍼 도일 감독 봤던 날 일기 포스팅 한 것도 있고 하니 그 감정선을 이어가고 싶기도 했고.

홍콩영화라고는 했지만 사실 중화권 영화를 두루 섭렵하겠다는 욕망에 불타올라 정말 매일 하루에 5편씩은 보고 잤던 것 같다(그래서 밤새는 날이 많았던). 장예모 감독의 장엄한 스케일의 서사도 좋아했고, 총질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하지만 그 속에 담긴 어떤 낭만이나 의리, 정 같은 것들에 감동했던 오우삼 액션, 거대 범죄 조직 간 대결이라는 흔한 플롯임에도 나름 섬세한 심리 묘사나 치밀함으로 느와르 장르의 매력에 푹 빠지게 했던 두기봉, 선을 넘는 설정과 기발함으로 완전 무장이 해제되는 웃음과 해학의 극치, 빅재미를 줬던 주성치 코미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부부-오군여 배우의 남편 진가신 감독의 여운 깊은 멜로, 못 다루는 주제가 없을 것 같은, 그것도 매번 깊은 울림으로 인생 영화를 갱신하게 했던 리안 감독 등등... 여기서 리안 감독 빼고는 다 실물 영접(특히 두기봉 감독은 내가 지금까지도 인생 엔딩 장면으로 꼽는 <심동>을 연출한 장애가 감독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감동이 배가 됐던!)했던 분들인데, 이렇듯 사랑했던 감독 만큼이나 사랑했던 배우도 많았다. 그 시절 가장 깊이 빠져있던 두 인물은 왕가위(아직도 2008년의 기회를 수업 때문에 놓친게 분한!)와 장국영. 왕가위를 좋아한 이유는 크리스토퍼 도일 포스팅에서 나름 정리를 해봤지만 장국영에 대해선 이 마음을 대체 어디서 끊어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미뤄뒀던 것 같다. 출연한 영화 대부분을 봤지만 아직도 유작 <이도공간> 만큼은 볼 엄두를 못 내고 있으니(그거 보면 이제 영영 끝이잖아! 귀신 나오는 스릴러라 좀 무서운 것도 있고).

홍콩영화덕후 주성철 기자님이 JTBC '방구석 1열' 장국영 특집에 출연하여, 장국영에 반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MC 윤종신의 질문에 답하셨던 부분을 직접 쓰신 책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에서 가져와보자면.

"영채신만큼이나 장국영의 미소가 아름다웠던 장면 중 하나는 <영웅본색>에 있다. 형 송자호(적룡)가 대만으로 잠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러 이제 막 훈련소에서 경찰 신입생 교육을 받고 있는 동생 송자걸(장국영)을 찾아간다. 저 멀리서 훈련을 받다가 형을 보자마자, 자걸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잃어버린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뛰어온다. 남자 형제가 없는 나는 형이 그렇게나 반가울까 싶었다. 더불어 현실에서 막내인 장국영이 형이나 누나를 만날 때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하다. 자걸의 해맑은 모습은 나중에 불거질 형제간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지만, 현실의 장국영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정말 저런 미소로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언제부터 반했을까. <패왕별희> 같은 무겁고 심각한 연기보단, 좀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반함' 포인트를 발견했던 것 같다. 터프한 남자는 별로 내 타입이 아니지만, 상처 입은 남자가 뿜어내는 거친 야성미에 '존멋' 연발하며 내내 심쿵했던 <성월동화>(경찰에 잠입한 마약 조직의 첩자를 잡고 나서 "이제 그만할래... 쉬고싶다..."고 하던 장면에선 마치 인간 장국영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마음 아팠던. Jason Chan의 'Moonlight Express'는 아이폰에 저장해두고 요즘도 듣는다), 요즘 시대였다면 더더욱 용납하기 힘든 세상 X날라리 바람둥이에다 나쁜놈이었지만 뭐 얼굴이 장국영인데 봐줄 수 있지(청순미 뿜뿜했던 20대 시절) 했던, 출연했던 영화 중 가장 예쁘고 풋풋한 꽃미모 뽐낸 <위니종정>, 구름 동동 떠다니는 화창한 날씨의 파리에서, 검은 가죽 자켓에 스카프 곱게 매고 거리의 화가가 완성한 자신의 초상화에 시크하게 '제임스'라 서명한 뒤 세느 강변을 거닐며 한껏 나른한 자유를 만끽하던 <종횡사해>(정말 보자마자 폭풍 캡쳐를 불렀던. 예전 블로그 뒤져보니 역시 2010년도에 사진 올려둔게 있다 ㅋㅋ 지난달 1일에는 인스타에도 올림. 아 정말 뇌리에 깊이 박혔던 장면) 외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 편수만큼이나 수도 없이 많지만(음... 가장 안 매력적으로 나왔던 건 <홍색연인>. 아직도 그가 왜 그런 영화에 출연했는지 잘 모르겠다. 현실에서건 극 안에서건 장국영은 어딘가 속박되지 않은 모습이 어울리는데 너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 듯해서 어쩐지 좀 거북스러웠음) 난 그의 '뒷모습'에 가장 반했던 것 같다. '방구석 1열'에서 윤종신이 언급했듯, <아비정전> 속 유일하게 장국영이 당당하게 걸어가는 장면. 그 뒷모습에서 당당함과 대비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서글픔과 외로움을 본 순간 화면 속으로 달려 들어가 와락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장면이 이리도 인상 깊었던 건 역시 나만이 아닌 듯, 권윤주 작가님이 예전에 영화 잡지에 연재했던 <스노우캣의 영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주먹 꽉 쥐고 걸어가던 뒷모습도 잊을 수 없다. 작년에 오랜만에 dvd로 이 영화를 보는데 저 장면에서 와, 참 잘 걸어갔다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훌륭한 뒷모습 연기가 풍부한 표정 연기 이상으로 깊은 여운을 줄 수 있는 건 보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있기 때문 아닐까."

이렇듯 홍콩영화는 그 시절 내게 너무 많은 즐거움과 얘깃거리들로 삶을 풍부하게 해줬다. 그때의 추억은 다 홍콩영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홍콩영화 별점을 매겨보고, DVD도 열심히 모았고, 부산국제영화제 티켓 오픈 날이 되면 아침 일찍 학교 컴터실로 달려가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보며 대기타다 '땡'하면 광클을 했고, 원하는 표를 못 구하면 현장 예매 때 노숙도 했다. 혼자 센텀 신세계 앞 매표소 가서 밤새 죽치고 있으면서 옆에 같이 죽치고 있던 홍콩영화 동호회 사람들과 밤새도록 홍콩영화 얘기하며 떠들고 먹을 것도 얻어먹고 돗자리 신세도 지고(경험도 없이 무작정 갔던 터라 정말 몸만 달랑 갔었는데 그들이 준비해온 돗자리와 담요가 없었다면 난 얼어죽었을 것...), 캐나다 살 적엔 같은 반 대만 남자애와 방과 후 학원 앞 올드포트의 벤치에 앉아 세인트로렌스강변의 경치를 바라보며 중화권 연예계에 대해 몇 시간 동안 폭풍 수다를 떨기도 했다. 같은 반 일본 여자애(좋아하는 영화배우를 말해보라는 수업시간의 질문에 "레슬리 장"이라 했던 내 답에 유일하게 반응해주었던)랑은 만나면 거의 장국영 얘기만 했다.

...그래서 난 홍콩에 뭐가 유명한지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장국영이 나온 영화 촬영지, 그가 마지막까지 살던 집, 자주 가던 식당, 투신(지금도 완전한 자살이라 믿진 않지만)한 호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촬영장소와 그가 다닌 대학 등등 이것만으로도 3박 4일 일정이 꽉 차서, 같이 간 대학 동기 S를 설득해야 했다. 그동안 S에게 홍콩영화의 탁월함과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고 감독인지 틈만 나면 떠들어댔기에, 여행 일정을 짜는 동안 들이밀었던 장소에 눈빛이 반짝였던 순간이 있었고 난 그걸 놓치지 않고 얼른 캐치 해 약장수 빙의해서 영업했다. 그래도 내가 목표한 모든 곳을 갈 순 없었지만. 장국영이 장만옥과 함께 출연했던 <연분>을 한편 때리고 홍콩으로 떠났던 2009년 12월.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라 예전 사진 들춰보며 다녔던 경로를 확인해보니 음... 첫째날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S가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옹핑 케이블카를 타러갔고(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별로 무섭진 않았으나 별로 재미는 없었음) 근처에서 망고 디저트를 먹었다. 하버프라자 노스포인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센트럴의 The Flying Pan에서 에그 베네딕트(S와는 이전에 뉴욕에도 함께 갔었고 그때 처음 먹은 에그 베네딕트에 꽂혀 학기 내내 뉴욕에서 먹은 얘기만 한 것 같다)를 저녁으로 먹고, S가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 길거리 풍경 여러 장 찍으면서 약간 소화 시킨 뒤 yee shun milk company에 우유푸딩 먹으러 갔다. 엄청 맛이 없었던 것 같은데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 소개되는 거 보고 놀랐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되면 재확인이 필요할 듯. 음반 가게에 들러 '해피투게더'와 '동사서독' DVD를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둘째날은 호텔 조식을 그렇게 먹고도 나서자마자 버블티를 먹으러 갔더라. 장국영의 마지막 장소였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인증샷을 찍고,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아무튼 유명하다는 어디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점심은 가이드북에 나왔던 식당(너무 찾기 힘들어서 포기하려는 순간 나타남)에서 완탕면을 꽤 맛있게 먹고,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로 넘아가 청킹맨션을 찍고 스타의 거리에서 손도장 보며 좋아하는 홍콩 영화인들 거 하나하나 다 찍었다. 스타의 거리에서 보는 홍콩섬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밤까지 기다렸다가 심포니 오브 라이트까지 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드뎌!! 왕 기대했던, 장국영이 가족들과 종종 들렀다는 딤섬집 '예만방'에 만찬을 즐기러 감.







둘이서 눈에 뵈는거 없이 막 시켰던 듯. 새우 제비집 딤섬, 금박으로 장식한 새우 샥스핀 딤섬(젤 비싼;;), 전복 새우 돼지고기 딤섬(마찬가지로 비싼 ㅠ), 다진 새우를 뭉쳐서 반죽 입혀 튀긴 핫도그(딸려온 핫소스에 찍어 먹으니 대박 맛있었음), 돈까스와 죽통밥, 망고 롤케익, 통조림 과일을 덮은 푸딩 등등... 모든 게 만족스럽고 푸짐했던 그날의 저녁식사. 셋째날은 왕가위 감독의 모교이자, 이전에 지도교수님이 면담에서 호텔관광으로 유명한 학교(내 전공도 관광경영학)라 언급하셨던 홍콩이공대학을 찾아 가...려 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 완전 반대 방향인 홍콩이공대학 기숙사로 가버렸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거리여서 ㅠ 아쉬운대로 기숙사 앞에서 인증샷 찍고 장국영이 마지막까지 거주하던 몽콕의 빌라로 가기 전, 랑함 플레이스에 있는 허니문 디저트에서 두리안 경단을 먹었는데 토하는 줄.


그리고 장국영 팬들의 성지 Kadoorie Avenue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동성 연인과 살았던(분명히 밝힌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작년에 읽은 왕가위 인터뷰집에서 이성애자가 아니었음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집. 시끌벅적한 몽콕 시장을 지나 조용한 주택가로 진입하는 언덕길이 나왔는데 조금 가팔라서 더운 날씨에 완전 헉헉대며 올라갔다. 우리처럼 기어다니는 사람은 없고 외제차 몇 대 왔다갔다하는 것만 봤다. 32A 주소 간판에만 누가 매달아 놓은 저 감귤을 보며 동시에 짠했던 S와 나.



밤엔 란콰이퐁으로 가서 <금지옥엽>에 나왔던 '프린지 클럽', <중경삼림>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있던 터 정도만 훑고 빅토리아 피크로 갔다. 멋진 야경을 보며 <성월동화> 속 마지막 장면을 떠올림과 동시에 다음번엔 꼭 남자랑 오리라... 다짐했으나 아직 미결로 남았다. <금지옥엽>에 등장하는 카페 Deco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내가 너무나 사랑한 모든 것들과 분위기 속에 몸을 풍덩 빠뜨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신사나운 광동어가 섹시하게 들리는 경지에 이를 정도로 푹 빠졌던 홍콩 한복판에서 열심히 헤엄쳤던 어느 날들. 주성철 기자님의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을 읽고도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두 번째로 못 가고 있으니 이젠 좀 답답하네. 다음번 방문에 가려 했던 <화양연화> 속 레스토랑, <아비정전>의 카페는 그 사이 사라진지 한참이나 됐고. 아 너무 가고싶다. 레슬리 위크에 꼭 다시 가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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