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부제: 발렌타인데이 로망) 난 뭘까

서울을 떠나와서 가장 아쉬운 점이자 있는 동안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쇼콜라디제이'에서의 경험일거다. 예전부터 위스키 마시는 사람이 참 멋져보였다. 술도 저렇게 조용히 음식처럼 즐길 수 있다니. 소맥에서 분위기란 걸 기대하긴 어려우니까. 이건 허세가 아니라 뭐랄까... 특히 회식같은, 보통 일반적인 술자리 특유의 와글거림이 싫고 분위기를 주도하지 못하거나 대화에 끼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기분을 겪어야 했던 일은 술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더 키울 뿐이었다. 게다가 소주는 아직도 노맛이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독약을 입에 털어 넣는 것 같다. 맥주는 그나마 맛있는 종류가 있는데 소주는 참이슬이건 화이트건 뭐건 간에 다 써!!서 못 먹겠다. 재미도 없다. 칵테일은 만드는 재료나 기법에 따라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다 그런 이름들이 붙여지게 된 스토리도 있고 위스키는 병이나 패키지부터가 디자인적으로 고급지면서도 예쁘다. 위스키에 입문은 하고 싶은데 술이 약하기도 하고 빈약한 알코올 이력으로 막 들이대기엔 겁도 나면서 아직 bar라는 공간이 어색하기도 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쉽고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알게된 '쇼콜라디제이'. 1년에 몇 번 있을까말까한 내 음주 경험을 한층 더 깊고 재밌게 만들어주었던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테이스팅 코스로 예약을 하고 퇴근 후 광화문으로 갔던 작년 6월 어느 날.



첫번째는 위스키 봉봉과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깨무는 순간 탁 터지는 더글렌리벳과 초콜릿의 조화가 어마어마하게 환상적이었고 초이스했던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디사론노의 조합은 그날 하루 꿀꿀했던 기분을 단박에 반전시켜버리는 아주 상큼쌉쌀하고도 어매이징한 혀 감각을 느끼게 해준 엄청난 맛이었다. 술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디사론노는 향에 반해 선택했던건데 넘 달콤했다. 끝맛도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이 기분 완전 좋아졌던.



번째는 리큐르 파베. 4가지 종류였는데 2~4번은 나한테 좀 셌음. 첫번째 리몬첼로는 굿굿! 리몬첼로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었고 이것 땜에 이탈리아 여행을 또 가야하나 했을 만큼 진짜 맛보고 싶었던 건데, 초콜릿에 입혀진 상태이긴 했지만 맛을 예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은 핫초코. 사장님이 추천한 술로 선택했는데 첫맛은 꽤 셌다. 이러다 취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갈수록 고급진 초코의 단맛이 더 강하게 올라와 결국엔 너무 행복해졌음. "너무 행복해지는 맛이에요!"가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터져나왔다. 진짜 사람 행복하게 하는 맛이야 ㅠㅠ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코스(라기 보단 한 주간 작업의 프레젠테이션 개념이라고 하셨지만)였는데 대표님의 설명도 참 흥미돋고 이 가게만의 철학이 넘 멋있었다. 쇼콜라디제이라는 재미난 이름과 공간의 구성, 제품을 아우르는 독특한 브랜드를 창조해낸 분은 분명 범상하지 않을 거란 예상을 했는데 역시나. 대표님의 인터뷰가 실린 <미식대담>(이용재 저)에서 난 또 깊은 감명을 받았네. 특히 브랜딩에 대한 깊은 고민과 과정을 말씀하신 부분에선 와 진짜 반해버렸다. 완전 멋진 분이야.

"초콜릿이 갖는 무드가 맥주나 와인하고는 좀 다릅니다. 초콜릿이 먹고 싶어지는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기분이 좋거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차분해지고 싶을 때, 위스키 한 잔이 생각나는 때와 비슷하지 않나요? 초콜릿의 형제 같은 음식이 스피릿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맥주랑 와인은 도수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초콜릿과 페어링하는 음료로서는 좋지만, 초콜릿 재료로서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죠. 개봉 후의 사용 가능한 기간도 짧고, 유통기한도 있어서 관리의 편의성 측면에서도 스피릿이 훨씬 매력적이에요. 물론 소비자로서도 칵테일이나 위스키에 매력을 느껴서 시작했어요. 초콜릿과 음료의 분위기, 그리고 시장성이 제 관점에서는 일치했습니다."

"브랜드 정체성부터 공간 구성과 관련해서 테이스팅 코스로 돌아가보고 싶어요. 쇼콜라디제이의 공간을 무대라고 보면 테이스팅 코스는 라이브 공연이죠. 공연이 좋으면 음반을 사잖아요. 초콜릿을 포장해 가는 것이 그런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테이스팅을 통해서 쇼콜라디제이의 다양한 요소들을 경험하고 그 느낌을 자기 공간으로 가져가는 것까지가 궁극적인 의도입니다. 낱개로 된 캡슐 형태의 포장 용기가 있는데, 싱글 앨범과 비슷한 샘플러의 개념이에요. 특정한 날에 와서 누군가를 위한 큰 선물을 사는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장소의 여운을 담아가는 곳이면 좋겠어요. 이처럼 제가 전달하고 싶은 줄거리와 디테일을 다른 분야 작업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구현하고 있습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면서, 이곳은 혼자나 가족 친구보단 연인과 공유하고 싶단 마음이 크게 들었고 매년 발렌타인데이는 이곳의 초콜릿으로만 기념하고 싶단 생각도 했는데 대표님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더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도 하나의 초콜릿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비슷할지 모른다고. 대규모 생산 업체로부터 카카오빈의 발효 및 분쇄 등의 1차 가공을 거친 커버추어 상태가 실제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라면, 쇼콜라티에가 맡는 2차 과정, 즉 커버추어를 녹여 온도를 맞추는 템퍼링을 거쳐 먹을 수 있는 완제품을 생산하는 일은 원하는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자아로 키우는 과정일 것이다. 수없이 많고 다양한 초콜릿의 세계에서 내게 가장 잘 맞고 알맞은 초콜릿을 만나는 일은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까. 쇼콜라디제이의 초콜릿은, 그저 기념일을 의무적으로 챙기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좀 더 '만남'에 대한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해보게 하는 매개체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상대가 없네. 돈 굳었네 뭐. 난 정말 이집의 초콜릿 같은 남자를 원하나봐. 초콜릿 특유의, 먹고난 뒤 텁텁한 입안과 달큼한 느낌을 싫어하는데 여긴 제품 하나하나의 끝맛이 말끔해. 전혜린이 쓴 이 문장 [지나간 시절의 미각들]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느꼈던 미각을 떠올리며 지나간 시간을 추억해보는 것. 쇼콜라디제이에서 경험한 맛은 내게 그렇게 기억될만한 특별함이다. 아 빨리 코로나 끝나고 다시 서울 갈 기회를 잡아야 또 맛볼 수 있을텐데.


그러고보니 나의 발렌타인데이 로망이 하나 더 있다. 쇼콜라디제이에 방문하기 4일 전쯤. 영화 <술과 장미의 나날>에서 여주에게 반한 남주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며 술을 거부하는 여자에게 "이게 바로 초콜릿"이라며 권했던 그 칵테일 '브렌디 알렉산더'. 이것으로 여주는 술맛을 알게되고 이후 알콜중독자가 돼 결국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 존 레논도 이 술을 '밀크셰이크'라 부르며 부담없이 즐기다가 어느 순간 훅 가버리곤 했다는, 이 치명적인 매력의 술!을 H 언니랑 술 얘기하다 갑자기 삘 받아서 밤 12시 다 돼서 마시러 갔던 날. 메뉴엔 없었지만 다행히 재료가 있어 만들어주셨는데 생각보다 달진 않았다. 좀 더 초코맛이 날 줄 알았는데 알코올이 훨씬 세고 강한 것이 전혀 밀크셰이크라 할 수는 없고, 여기서 알코올만 뺀 음료를 샘플로 주셨는데 그건 정말 밀크셰이크 같았다(티라미수를 액체화한 듯한 맛). 존 레논이 워낙 술꾼이라 그런 표현을 했는지는 몰것지만 나 같은 술못에게 그 정도는 셌음... 심야의 재미난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발렌타인데이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이라 불리는 저 칵테일을 한 잔 사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지만 실현 가능한 날이 언제 올지는 참으로 아득하기만 했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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